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주 최씨 (문단 편집) ==== 토최설만 인정한 문열공·사도공계 ==== 이상에서처럼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 이야기, 문열공계 및 문성공계의 설명, 삼국사기 최웅의 기록, 서유구의 최치원 출생지 언급, 각종 역사학 논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고구려-수 전쟁|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이후 [[통일신라|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가 건국되기까지 약 3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전주에는 고구려 유민들, 중국에서 내려온 사람들, 경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섞였을 가능성이 높다. 흔히 왕조시대엔 조세의무와 농경, 공역 등을 위해 거주지 이전이 엄격히 제한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대 삼국시대에도 거주지 이전은 가능했다. 관직 부임이나 결혼 등을 이유로 본적지 관청에 신고한 후 적법한 절차를 밟으면 이주가 가능했다. 특히 통일신라 당시에도 지방민이 왕경(王京)인 경주로 옮겨오는 것은 다소 제한적이었으나, 반대로 경주에서 지방으로 옮겨가는 것은 인구분산 차원에서도 장려되는 편이었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출처: 김창석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7세기의 골품제와 관등제 - 주민의 편적(編籍)과 이주를 중심으로>, 2019년] 다만 현재에 와서 당최설은 '모화사상으로 인해 자신의 선조를 중국에서 왔다는 식으로 지어내려고 했던 의도'라고 풀이되며[* 가장 대표적인 게 다산 [[정약용]]을 배출한 나주 정씨다. 나주 정씨는 압해 정씨에서 분적했는데, 압해 정씨의 시조는 [[당나라]] [[문종(당)|문종]] 때 대승상을 지낸 정덕성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약용은 정덕성에 대해 "사실 관계에 대한 고증이 어렵다"며 실존 여부를 회의적으로 보았다. [[정약용]]은 증조부로부터 자신에까지 문헌을 연구하고 현지를 답사한 결과 정덕성은 후대에 모화사사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라고 주장했으며, [[고려]] 중기의 무신 정윤종을 시조로 인정했다.], 현재 문열공계와 사도공계는 [[족보]]에서 토최설만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